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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학년도 생활수기 응모작 - 정세희
번호 : 73 등록일 : 2012-11-23 조회수 : 1907

체리세이지가 우리에게 남긴 것

 

 

작년까지 23년을 살면서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 떠나 외지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이 전무한 학생이었다. 그랬기에 나의 첫 기숙사 생활은 ‘여자 기숙사’라는 단어가 던지는 소설 같은, 드라마 같은 핑크빛 두근거림만큼이나 설레면서 시작됐다. 처음으로 만난 ‘룸메이트’는 이제 막 전공에 진입한 화학과 2학년인 귀여운 동생이었다. 나보다 네 살이나 어린, 과학고를 조기 졸업한 이 친구는 기숙사 생활면에서는 나보다 굉장한 선배였는데, 어느 날 공부하다 피곤하거나 복잡해질 때 보면 좋다면서 작은 허브가 담긴 꼬마 화분을 가만히 책상 위에 갖다 놓았다. 성공적인 ‘여자 기숙사’에서의 소소한 일상을 꿈꾸며 나는 주말에 집에 돌아가 엄마가 새로 구입한 아직 어린 이름 모를 식물이 담긴 화분 하나를 챙겨 돌아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화부장으로서 교실에 있는 열댓 개의 화분들을 가꾼 경험을 기반으로 빠짐없이 물을 주고 환기해주며 식물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허브를 키워드로 이미지 검색을 하고 블로그들을 방문하면서 마침내 똑같은 잎 모양에, 내 화분엔 두 개뿐인 꽃이지만 똑같은 꽃을 피우는 식물을 찾았고 내 예쁜 화분 속 식물은 이름을 얻었다, ‘체리세이지.’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초록색 꽃잎 주머니 속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빨간 꽃잎 하나를 보면서 사탕 같은 행복에 젖어 있다가 발견한 진디를 계기로 나는 아무리 진디 제거제를 뿌려도 소용이 없던 내 책상 위 화분을 내 시야에 가장 가까운 곳이자 햇볕이 잘 들고 환기가 잘 되는, 의관으로 가는 구름다리 구석으로 옮겨야만 했다.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창문을 열고 바람이 통하게 하자 진디는 눈에 띄게 줄었다. 게다가 삼시세끼 밥을 먹으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구름다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의도치 않게 매일 체리세이지를 관찰하고 물과 애정을 주었다. 그렇게 초록이 무성한 화분을 가꾸기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다. 금방 꽃을 피우겠지 기대했는데 쉽사리 꽃을 피워주지 않던, 그래서 약간은 체리세이지에 보내는 일방적인 텔레파시에 지쳐가던 즈음에 꽃은 드디어 신호를 보냈다. 곧 내가 만개하리라. 마치 한 순간에 터지려고 기다려 오기라도 한 듯 이곳저곳 줄기에서 꽃봉오리가 피어나더니 회색바닥과 칙칙하고 먼지 낀 초록색 지붕뿐인 구름다리에 분홍빛, 자줏빛 행복을 점찍어나갔다. 내 사랑과 애정을 먹고 생명 같지 않았던 이 작은 존재가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매일매일 내가 줬던 사랑과 애정을 조금씩 돌려받으며 소소한 행복을 즐겼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어느 날, 이 밖에서도 내 화분이 잘 보일까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어 구름다리를 쳐다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내 화분 앞에 모르는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저기에서 남의 꽃을 보고 있을까, 혹시 꽃을 뜯지는 않을까, 훔쳐가거나 거기에 둔 것이 불편해서 치워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잔뜩 불안을 집어먹고 꼼짝도 못하고 서서 혹시 집어 들기라도 하면 내 것이라 소리칠 요량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 학생은 한참을 보기만 하더니 이내 돌아갔다.

 

그 뒤로도 나는 낯선 학생이 내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잠시 동안 바라만 보다 가는 것을 자주 발견했다. 처음 한 두 번은 내 화분을 해친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봤었는데 모두 그냥 바라만 보고 갈 뿐이었다. 어떤 날은 흙이 말라있는 것을 보고도 수업에 늦을까 하는 마음에 그냥 지나친 적이 있는데 다녀와서 물을 주려고 보니 벌써 촉촉이 젖어 있기도 했다. 그랬다. 구름다리 구석에 자리하고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체리세이지는 예관에 사는 여학생들의 꽃이 됐다. 아마도 2층 구름다리를 통해 식사를 하러 가는 예관의 모든 학생은 못해도 한 번쯤은 내 체리세이지를 봤고 기억할 것이다. 그 중에 꽤 많은 학생들은 잠시 멈춰 신이 나서 만발하는 빨간 꽃잎들을 바라봤을 것이고 몇 사람은 물도 주고 사진도 찍어갔다. 가끔 내가 물을 주고 진디 제거제를 뿌려줄 때 지나가던 내 친구들, 후배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묻기도 했다. 그거 네가 키우는 거였니? 언니, 언니 꽃이에요? 되게 많이 자랐네요. 원래 꽃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무심한 표정으로 세수를 하고 손을 씻고 빨래를 하고 복도를 걸어 다니는, 다른 기숙사생들한텐 관심이 손끝만큼도 없을 것만 같던 같은 층의 다른 여학생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 학기만 산다고 해도 벌써 4달을 같은 층에서 생활하는 FLOOR MATE들은 끝내 시간이 다 갈 때까지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고 생활을 끝낸다. 바로 옆방 사람과도 인사하지 않는 무관심이 가득한 기숙사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는데 체리세이지 앞에서 다정한 눈길을 보내던 학생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누군가는 방에 또 다른 식물을 예쁘게 키우고 있겠고 내 체리세이지 꽃을 찍어간 누군가는 휴대폰 바탕화면에 밝게 핀 꽃을 배경으로 설정했겠다고 생각하니 복도를 걷는 무표정한 학생들이 부끄러워 표정을 감추는 꽃들처럼 느껴졌다(쑥쓰러운 표현이지만 적어도 이 생각을 하던 당시에는 그랬다).

 

꽃이 생명의 기운을 열심히 뿜어낸 덕분에 곤충이 조금씩 드나들고 곤충이 생기니 거미도 자리를 잡았다. 칙칙한 구름다리가 생명의 공간이 되는 것은 생명과학과인 나만 좋고 다른 사람들은 다 싫어할 만한 사건이었다. 떨어지는 잎과 꽃잎을 간간이 쓸고 줍긴 했지만 매일같이 기숙사의 청결을 지켜주시는 미화 어머니껜 너무 죄송한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끝내 나는 1~2층을 쓸고 닦아 주시는 어머니께 찾아가 사실 저기 꽃이 제 꽃이고 앞으로 성가시지 않게 제가 틀림없이 깨끗하게 지키겠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예상 밖에 어머니께서는 기쁘게 웃으시며 학생이 키우는 거냐고 안 그래도 너무 잘 커서 정말 열심히 가꾸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시며 죄송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식물 키우는 걸 정말 좋아한다, 앞으로도 잘 키우라고 격려까지 주셨다. 그 뒤로 미화 어머니께서도 체리세이지에 물을 주시고 직접 줄기 정돈까지 하시며 체리세이지를 가꾸어주셨다.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으로 진로를 결정하면서 학부연구생으로 나는 굉장히 많은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내는 중이다. 게다가 학기가 끝나고 방을 4층으로 배정받는 바람에 더 이상 2층 복도에 두고 가꾸는 것은 어렵게 되어버려서 화분을 아예 실험실 근처로 옮겨 가꾸고 있다. 비록 화분은 이제 기숙사 구름다리에서 사라졌지만 나에겐 구름다리 화분이 있던 자리는 내 시선이 멈추게 만드는 기억의 장소가 되었다. 체리세이지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꽃을 바라보던 그 학생도 구름다리의 체리세이지를 추억하고 있을까. 밥 먹으러 구름다리로 향하는 학생들도 체리세이지가 있던 자리를 보며 그 때 빨갛게 꽃피우던 체리세이지를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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