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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내 인생 첫 기숙사 생활 그리고 마음 따뜻한 사람들
번호 : 140 등록일 : 2012-11-23 조회수 : 2165

내 인생 첫 기숙사 생활 그리고 마음 따뜻한 사람들

 

나는 이번 학기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학부생으로 공부할 때는 집에서 통학을 했기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하고 기숙사를 입사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통학 시간의 절감이라는 부분만 신경 쓰고 있었다. 따라서 내게 기숙사는 가까운 생활공간을 제공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내게 기숙사는 단지 생활하는 공간이 아니라 내 편견을 고쳐주고 나를 따뜻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지금까지 만난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서있다.

20123월 중순에 나는 의관 기숙사에 중도입사하게 되었다. 당시 연구실에서 학부연구생으로 공부하고 있었고 통학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기숙사의 빈자리를 찾아보고 있었다. 마침 의관에서 빈자리가 있다는 공지를 확인했다. 바로 기숙사비를 입금하고 짐을 챙겨서 다음날 입사하게 되었다. 기숙사 운영실에 가서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키를 받아 의관으로 향했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지내야 하므로 룸메이트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평소 기숙사에 사는 친구들에게 기숙사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건 룸메이트와 잘 맞는지의 여부라고 익히 들었기 때문이다. 보통 생활하는 시간이 비슷하거나 청소 및 기본생활에 대한 부분에서 맞지 않아서 자취를 하러 나가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경비실에 가서 중도입사자라고 말을 하고 리스트를 확인하니 내 룸메이트는 중국인이었다! 무수한 인터넷의 글들과 덴마크에서 교환학생시절을 겪으며 느꼈던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반감이 올라왔다. 실망과 걱정을 안고 내 방으로 향했다. 키를 열고 들어가려는데 설상가상으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키를 꽂았는데 돌릴 수가 없었다. 거의 15분간 낑낑대고 있으니 짜증이 몰려왔다. 결국 운영실에 가서 방문을 새로 교체하고 키를 두 개 받았다. 하나는 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룸메이트를 주라고 했다. 하루 종일 짐을 옮기고 문까지 말썽이니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났고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룸메이트에게 키를 전달하라니 정말 짜증이 났다. 결국 룸메이트 연락처를 알아내고 전화해서 그가 있는 연구동으로 갔다. 만나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상황을 설명한 후 키를 전해주었다. 그날 밤, 한시쯤 기숙사에 돌아오니 룸메이트가 먼저 와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니 보던 것을 멈추고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였고 우리는 대화를 하게 되었다. 보통 내가 만났던 중국인 친구들과 달리 나와 친해지기 위해서 먼저 다가와 주었고 우리는 첫날밤(?)에 서로의 가족,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연구실 생활 등을 이야기하면서 웃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 중국인 룸메이트와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생활을 했다. 내가 처음에 우려한 것과 다르게 내 룸메이트는 허락 없이 내 물건을 쓰거나 방안에서 향이 강한 음식을 먹거나 내가자는데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하면서 성가시게하거나 하는 것들이 전혀 없었다.

다행이도 우리는 생활 패턴이 거의 비슷했고 서로에 대해 충분히 존중했다. 방학이 되면서 그 친구는 다른 중국인 친구와 방을 구해 나갔고 나는 인관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한 학기 동안 중국인 룸메이트와 생활하면서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떨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인관기숙사에서 만난 김영기 아저씨와의 인연이다. 나는 학부연구생으로 20122학기에 대학원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름방학동안은 인관에서 생활하기로 결심했다. 41실이라 조금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의관에서 지낸 터라 다른 곳에서 생활해보고 싶었고 경제적인 이유로 인관을 선택했다. 의관에서 지내다 인관으로 옮기니 많은 부분이 불편했다. 일단 통금시간이 1시로 고정되어 있어서 1250분쯤 되면 연구실에서 나와 급하게 달려야 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저씨들과 마주치는 일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일찍 다니라고 하셨지만 가끔 웃으면서 달려오는 것을 보면서 대놓고 문을 잠그는 척을 하는 장난을 치시는 분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무안한 웃음을 지으면서 열어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했다. 그렇게 아저씨들과 안면을 트게 되니 자연히 식사를 하러 가거나 운동복을 챙기거나 할 때 아저씨들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 나를 유심히 관찰하시고 하루는 한 아저씨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참 인사성이 밝아서 보기 좋다. 내가 지금까지 기숙사 경비를 하면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자주 웃고 인사성 밝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성공했어 너도 잘 될 거야아저씨는 내게 힘을 주고 격려해주기 위해 해주신 말이었지만 나는 생전 처음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경비 아저씨와 인사하며 친해지고 이런저런 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아저씨께 계속 인사를 했고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8월의 마지막이 되갈 즈음 아저씨께서 갑자기 나를 부르시고는 야식을 먹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나는 막 운동을 하고 온 터라 그냥 주시면 감사히 받아두려고 했다. 그런데 아저씨께서 내민 것은 다름 아닌 8월 식권 5장이었다. 내게 지금 얼른 가면 식당에서 야식으로 교환해서 먹을 수 있으니 가서 먹으라고 하셨다. 나는 아직 며칠이 남았고 아저씨께서도 식사할 때 사용하셔야 하지 않으냐고 물었고 괜찮다며 젊은 사람이 더 먹어야 한다고 내게 주셨다. 나를 많이 챙겨주셔서 참 감사했다. 9월에 대학원생이 되어 의관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씀드리며 그래도 식사시간에 자주 인사드리겠다고 하니 웃으시며 아저씨도 의관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 11월을 얼마 앞두지 않은 지금도 나는 김영기 아저씨를 보면 웃으며 인사드리고 아저씨는 여전히 밝게 인사를 받아주신다. 요즘도 나를 기억하셔서 바쁠 때 며칠 건너뛰고 나타나면 오래간만이라고 하시면서 밝게 웃어주신다.

내가 겪었던 이 작은 경험들을 통해서 앞으로 입사하게 될 후배들이 마음을 열고 즐거운 기숙사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들 역시 마음 따뜻해지는 경험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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