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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뜻밖의 선물
번호 : 203 등록일 : 2014-11-25 조회수 : 3063

< 뜻 밖 의   선 물 >

 

박 희 진

 

 

  "오늘 무슨 날이야?"

  여느 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숙사 문을 통과해 나가는데 들려오는 나이 지긋한 목소리였다. 말을 걸어올 사람이 없기에 당황해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고개를 드니, 문 바깥에서 뒷짐을 진 채 날 바라보시는 경비 아저씨가 계셨다. 새벽 일찍 바쁜 걸음으로 대기업 적성고사를 치르러 가는 나를 보고, 앞서 비슷한 모양으로 바쁘게 나간 사생들이 많아 중요한 날이라도 되는지 퍽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어색했지만 먼저 말을 걸어주셨으니 성의 있게 대답해 드렸다.

  "네, 오늘 아마 기업들 시험 보는 날일 거예요."
  "그래? 잘 다녀와."
  "네, 감사합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다행히 새벽의 찬 공기가 뜨거워진 볼을 식혀주었다.
  이렇게 금방 편하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인데, 4학년 마지막 학기라 여러모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나는 여태껏 경비 선생님들께 짧게 인사할 여유도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신관에 살았을 때에는 경비실이 동떨어져 있어 스쳐 지나가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예관도 그럴 줄만 알았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사실상 하루에 가장 많이 얼굴을 보는 분을 부러 모른 체하고 지나쳤었던 걸까? 푹 숙이고 다녔던 고개를 조금만 더 들었어도 눈 인사 정도는 진즉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날 이후로, 경비 선생님들께 살갑게 인사를 건네지는 못해도 눈이 마주치면 목례 정도는 자연스레 할 수 있게 됐다.

 

 

 

 

 

  "어디 가?"

  움찔, 걸음이 멈추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먼저 났다. 또 그 아저씨다.

  "이번에는 대학원 면접이요!"
  "어, 그래?"

  살면서 처음 정장을 쫙 빼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서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하자마자 얼른 기숙사 현관을 달려나갔다.
  이상하게 얼굴만 봐도 친근함이 느껴지는 아저씨셨다. 여러 분의 경비 선생님들 중에서도 특히나 내게 많이 말을 걸어주시는 분. 원래 인간 관계에서 필요한 만큼만 안면을 트는 것이 덜 피곤한 일이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해 왔던 내 마음 속 경계심을, 아저씨는 친구에게 거는 듯한 짧은 말 한 마디로 순식간에 녹여버리셨다. 왜 그럴까 생각했더니, 답은 바로 나왔다. 왠지 모르게, 아저씨를 보면 12년 전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무렵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많이 닮은 것은 아니지만, 뭐든 화내지 않고 수용해주실 것 같은 장난기 서린 얼굴. 그게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어릴 때에도 무뚝뚝했던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 울지 않았다. 울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장녀로서 엉엉 우는 것은 가뜩이나 슬픈 부모님을 더 힘들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혼자 되신 할머니를 돌봐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 목 놓아 우시는 걸 보고 같이 조용히 눈물을 흘렸을 뿐이었다. 병환으로 평안하게 돌아가시지 못하셨던, 손녀로서의 예쁜 모습을 잘 보여드리지 못한 할아버지가 애잔하게 떠오르니, 나답지 않게 잠시 정도는 그렇게 추억에 젖어들었다.

 

 

 

  날이 춥다가 오랜만에 풀린 날이었다. 주말이라 서울 집에 올라갔다가 다시 막 학교에 도착한 터라, 기숙사의 화단 사이 좁은 길을 맥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어디 다녀와?"

  나무가 심어진 쪽에서 무심한 듯 정감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기도 없이 대뜸 내뱉으시는 말씀에는 그래서 더 묘하게 장난스러운 느낌이 있었다. 또 나답지 않게 웃음이 나서, 장난스레 대답해 드렸다.

  "집이요. 거기에서 뭐하시는 거예요?"
  "열매 줍고 있는 거야. 자!"

  장갑 낀 투박한 손으로 슥 들어 보이시는 건 큼지막하고 알차게 익은 모과 두 알이었다. 이런 곳에 모과 나무가 심어져 있었나?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모과예요?"
  "어."

  아저씨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시길래 설마 했는데, 내 손에 달콤한 향기 나는 그 모과 두 개를 얹어 주시는 것이다.

  "저 주시는 거예요? 우와."

  진심으로 감동했다.

  "가져가 방에 놔."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을 멋대로 가져가도 되는가 싶었는데, 받아들고 현관을 향해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신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부담 없고 기분 좋아지는 선물은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았다. 왜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을까? 어렸을 적 나와 동생을 불러 앉혀놓고 재미 있는 옛날 얘기를 해 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스쳐갔다.

  "이것 봐, 경비 아저씨가 주셨다!"

  평소에 선뜻 말을 먼저 걸지 못했던 룸메이트에게 들뜬 목소리로 자랑까지 했더랬다. 부러워하는 룸메이트를 보고 잠깐 뿌듯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아저씨에게 나는 별명 하나를 붙였다. '모과 아저씨'. 속으로만 부르는 별명이라 아저씨조차 모르실 것이다. 아저씨는 기숙사생들 모두에게 친근하게 대하시느라 내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이 커다란 건물 안에서 믿음과 정감이 가는 친구 한 명을 드디어 얻은 기분이었다.

 

 

 

 

  모과 아저씨와의 에피소드는 놀랍게도 이것뿐만이 아니다. 유치하지만, 혹시 아저씨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잠시 내게 찾아오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자주 엮이게 되었다.
  프린터기를 급하게 써야 하는데 만 원 밖에 없어서 염치 불구하고 오천원짜리 두 장 있으시냐고 부탁드렸다가 음료수값까지 용돈으로 받아버리기도 했고, 샤워실을 간 사이 룸메이트가 문을 잠그고 가 버려 열쇠를 빌리러 황망히 내려갔을 때 날 구제해 주신 것도 아저씨셨다.
  그 때에도 아저씨는 이렇게 나를 놀리셨다.

  "열쇠? 없는데?"

  어찌나 당황했던지. 그 장난기 감춘 황망한 표정에 깜빡 속았더랬다.

  "진짜요? 어떡하지..."
  "에이. 있지, 당연히."
  "아이, 아저씨!"
  "5분만에 다녀와야 해. 안 그러면 큰일나."
  "네? 정말요?"
  "퇴사야, 퇴사. 큰일나."
  "아휴. 또 거짓말이시죠?"

  아무리 농담이라도 가슴 철렁한 말이었다. 내가 허겁지겁 뛰어 올라갔다가 문을 열고 내려온 걸 보시고, 아저씨는 그제야 허허 웃으시며 약간 늦었다고 질책까지 하셨다. 좀 더 친해지면 아저씨는 모과를 닮았다고 농담을 건네 소심한 복수를 해보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경비 선생님들을 완전히 타인으로 생각했다면, '그냥 벌점만 받고 늦게 들어가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통금 시각이 아슬아슬할 때에도 그저 여유롭게 기숙사에 귀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들이 1시 가까이 되면 슬슬 걸어나오셔서 바깥을 확인하시는 모습을 보고 또 가슴 따뜻한 정이 느껴졌던 나는, 될 수 있으면 통금 시각을 지키려고 그 앞에서 숨이 턱에 차도록 열심히 뛰곤 했다. 12시 59분에 아슬아슬하게 세이프하면서 아저씨들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넬 때의 성취감이란. 소소하지만 재미난 일상의 에피소드들이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후 몇 주 간, 침대에 누울 때마다 머리맡 책상 위에 놓아둔 모과에서는 달달한 향기가 은은하게 났다. 나름대로 자그마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서 창문을 닫아 두어야 하는 찬 날씨가 됐는데도 모과는 여전히 책상에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오래 두고 싶어서 건드리지 않고 있었더니, 모과 한 쌍은 그새 늙어서 거뭇거뭇한 감자 같이 되어 있었다. 모과가 오래 되면 갈색으로 변해버리는 건 처음 알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것이었는데, 적잖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안 버리고 싶다...'

  정겨운 선물 하나가 그렇게 자그마한 추억의 한 조각으로 퇴장하고.
  아쉽긴 하지만, 다음을 은근슬쩍 기대해 보는 내가 있었다.

  '봄이 되면 꽃을 따 주시려나...'

  그렇게 되면 뜻밖의 선물을 주었던 뜻밖의 친구 앞에는 분명히 더 향기 나는 수식어가 붙게 될 것이다.
  그 날을, 기대해 본다.

 

 

  여담이지만, 모과에 감동했었다고 말씀드리니 허허 멋쩍게 웃으신 아저씨가 경비실에 차곡차곡 모아두셨던 모과를 또 선물로 주셨다! 한사코 사양하시지만, 집에 올라가면 모과청을 담아 선물해드리기로 약속했다. 마음이 바쁘고 삭막한 졸업 준비 생활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새삼 떠올리게 해 주신 분께 나도 정으로 보답해드리려 한다.

  모과 아저씨,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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